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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인생의 절반을 함께 한 친구들이 모두 곁에서 사라진 사내의 심정은 허탈함과 적적함이 찾아오기 마련이다. 루카스는 이민을 갔고, 유리는 출국 후 행방불명됐고, 레이는 억울하게도 책임 태만을 이유로 해임되었다. 그 밖의 다른 동료들은 죽거나 마찬가지로 퇴직하였고, 벤 캘링턴은 혼자 높은 자리에 앉아 있었다. 하지만 그 어떤 지위에 앉는다 하여도 자신의 친구들을 잃은 상실감을 대신 메울 순 없었다. 이런 상실감이 일상이 되다보니 벤은 자신도 이 일을 그만둘까 진지하게 고민을 시작해본다. 해병대에서 12년, FBI에서 21년을 근무한 그에게 남은 것은 연간 약 4만 달러 정도의 연금과(이 연금에는 국가유공자 연금이 포함된다) 책 또는 TV 출연으로 벌어먹을 법한 참전경력과 수사경력이다. 누군가는 대단한 존재라 여길 법하지만, 적어도 벤에게는 그렇게 가치있게 느껴지는 것들은 아니었다. 그들의 친구에 비하면 말이다.

하지만 예상치 못한 대통령의 백악관 호출에 FBI 부장(副長) 벤 캘링턴의 퇴직은 아주 머나먼 이야기로 연기되었다.

" 날? 왜? "

보고를 전하러 온 사람조차 이유를 모르고 그저 대통령이 급하게 부른다는 말만 반복할 뿐이었다. 껄끄러운 여운이 남았지만 당장 그 껄끄러운 의문을 풀 수 없었던 벤은 넥타이를 단정히 잡고 재킷을 입고 혼자 쉐보레 SUV에 몸을 싣고 백악관으로 향했다. 비밀경호국은 자신의 FBI 요원증을 보여주자 흔쾌히 열어주었고, 백악관 집사는 대통령집무실까지 그를 바로 안내해준다. '대통령이 기다리고 있다'는 말과 함께. 대통령과 얼굴을 마주한 캘링턴은 공손하게 자신의 도착을 보고하였고, 프리먼 대통령은 한껏 터프한 웃음을 얼굴에 피우며 경례를 해주었다. 벤 역시 대통령의 대답에 해병대식 경레로 답해준다. 프리먼이 경호원들에게 나가라는 손짓을 하고는 벤에게 푹신한 의자를 권한다.

" 모크루 의원님께 자네 얘긴 많이 들었네, 캘링턴 부장. "

모크루 의원. 민주당 상원의원이자 캘링턴의 양육자인 그는 민주당에서 차기 유력한 부통령 후보 또는 캘리포니아 주지사 후보이다. 현재 대통령인 제라드 프리먼의 정치적 후원자였다. 대통령이 연방부서 국장급도 아닌 자신을 호출한 것은 정치적인 의도나 수사의뢰를 위함이라고 생각했지만, 의문점이 몇 가지 있었다. 정치적 후원의 확장이라면 그는 고위 공무원이기 때문에 정치활동을 할 수 없었고, 그는 미성년자 시절 양육자였던 모크루 의원과 별거한 지 수십 년이 되었기 때문이다. 수사의뢰를 하고자 한다면 자신이 아니라 FBI 국장이나 최소한 차장에게 지시해도 될 일이었다. 벤은 가식적인 영업용 웃음을 오래 유지하는 능력은 없기 때문에 비록 대통령의 앞이었지만 얼굴이 일그러졌고, 그저 티나게 일그러지지 않고자 노력할 뿐이었다.

" 자네도 뉴스나 신문에서 봐서 알다시피, 난 내년에 다시 선거에 나갈걸세. "

"아~ 정말이지 똑같은 정치인 놈들이야."라는 말이 입 밖으로 튀어나올 뻔한걸 벤은 겨우 참아냈다. 입 안에 그 말을 꽁꽁 묶어둔 자신이 정말 대견할 정도로 말이다. 대통령은 자신이 선거에 나가서 어떤 문제를 해결하고, 어떤 정책을 실시해서 더 좋은 세상을 만들건지, 동시에 그것들이 민주적인 절차에서 빠르게 이루어지기까지의 과정이 순탄치않다는 주절거림을 늘어놓았다. 벤은 그럼 그렇지 하는 생각이었지만 엄연히 공식적으로 최고 상관이기 때문에 신병과도 같은 자세로 대통령의 한껏 해이해진 주절거림을 듣고만 있었다.

" 지금까지 말한 문제도 그렇고… 국가안보의 위해요소를 확실하게 선명하게 제거해야하지. "

" FBI는 국가안보의 위해요소를 제거하고자 24시간내내 노력하고 있습니다. 대통령께서는 여기서 우리 요원들에게 무엇을 더 바라시는지 모르겠습니다만-- "

" 어, 어, 노력만 할 뿐이지, 그 근원을 제거할 생각은 한 적 없다는 의미로 들리는군? "

벤은 살짝 감정이 격해지는걸 느꼈다. 금이 간 파이프에서 증기가 새어나오는 정도로 말이다.

" 외람된 말이지만, 대통령께선 말씀이 지나치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

" 지금까지 그들의 본거지에 반격의 기회는 한 번도 없었지. "

" 2016년 ISIL의 국토 테러모의를 막았고, 2018년 '디스토피아' 학살음모 이래로 저희는 불철주야 수사를 진행하였고 연방 전역의 특수요원 절반은 일 주일 내내 가족의 얼굴은 커녕 목소리도 못 들을 정도로 일했습니다. 그리고 최근에는 39명이 순직하였고, 12명이 부상과 PTSD 등으로 직무수행에 고초를 겪어 퇴직하였습니다. 저희, 그냥 연방세나 날로 먹는 집단이 아닙니다, 대통령님. 근원을 제거할 생각을 한 적이 없다고요? CIA와 국토안보부끼리도 서로 정보가 안 맞고 충돌하는 이 와중에 저희에게 그렇게 말씀을 하시면 죽은-- "

" 아, 진정하게. 이렇게 말하기는 해도, 자넬 질타할 의도로 부른건 아니니까 말야. 난 그저 내가 지적한 문제를 해결해 줄 특별한 친구를 자네에게 소개해 주고자 할 뿐일세. '새 친구'를 소개하지, 분명 서로 구면일거야. "

대통령이 손짓하는 쪽으로 고개를 돌린 벤은 동공이 커지고는 자신도 모르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게 된다. 그 방향에 있던 사내는 벤을 보더니 호오 하고는 싱글벙글이다.

" 넌… "

" 자칭 크래커의들의 주님이지. "

노란 눈동자에 소름끼치는 검은 흰자위를 한 사내가 주머니에 손을 넣은채 성큼성큼 걸어온다. 머리카락으로 가려진 왼쪽 눈을 벤에게 드러내보이고는 씨익 웃자, 가려진 왼쪽 눈의 붉은 눈동자가 소름끼치게 느껴질 지경이었다.

" 아안녕, 클레먼트~? "

이죽거리는 악마와도 같은 미소를 띄는 그가 씨익 입꼬리를 올리며 한쪽 주머니에서 손을 꺼내 척 들고는 벤에게 인사를 한다. 벤의 놀란 얼굴은 이내 분개로 가득찬 얼굴이 되어 주먹부터 날아간다.

" 이 개새끼가 대체 어떻게 여깄는겁니까, 대체 네가 어떻게 여깄는거야 이 개새끼야?! "

" 진정하게, 캘링턴. 진정-- "

" 네히히히, 그냥… 두세요… "

소름끼치는 눈을 가진 사내는 이죽거리고는 벤의 주먹을 일부러 다 맞아주었다. 코피가 나고 입술이 불어터졌지만, 그는 아픈 내색을 보이지 않고는 피를 옷깃으로 문지르며 다시 씨익 웃음을 띄운다. 벤의 굵은 손바닥으로 뺨을 추가로 맞고 말이다.

" N은 이제부터 미합중국의 국가안보를 위해 국토안보부, 국방부, 법무부와 함께하기로 하였네. 그가 우리를 돕는 댓가로 자네를 요구했지. "

" 대체 그게 무슨 소립니까? "

" 파트너 말이야, 클레먼트~ 파트너! "

악동의 웃음기와도 같은 목소리로 대신 답하는 N을 힐긋 노려보던 벤은 다시 프리먼 대통령에게 고개를 돌렸다.

" N, 그가 디스토피아의 잔당들과 지도자의 정보를 넘겨주었네. 그리고 미국의 안보를 위협하는 또다른 친구들의 정보도 넘겨줄 것을 제안하였지. 자네와 같이 일할 기회를 준다면 넘겨주겠다고 하더군. "

" 아! 그거 이미 당신 조무래기 친구들에게 넘겼어, 대통령나리. 걱정마. 난 약속은 잘 지키는 사람이니까. "

벤은 이해할 수 없었다. 분명히 자신이 고층건물에서 내던진 테러리스트의 간부가 자기 눈 앞에 버젓이 살아돌아온다는 것도 그렇지만, 죽은 줄 알았던 '유사인간'이 이제는 대통령과 협상할 위치에 앉아서 자신과 파트너가 되겠다고 한다는 것도 이해할 수가 없었다. 테러리스트들의 또다른 꿍꿍이라기에는 너무 무모하고, 너무 허점이 보이는 작전이었다. 그리고 N은 벤에게 있어 한 때 자신이 죽였(다고 생각했)던 쓰레기범죄자이자, 자기 동료를 사지로 내몰았던 '개새끼'에 불과했다. 파트너로 같이 일한다는 것은 어림도 없는 말이었다. 당연히 벤은 대통령에게 자신의 뜻을 관철하고자 하지만, 보기 좋게 거절당한다.

" N은 우리와의 협력을 위해 수배범, 재소자들이 은닉한 수천 만 달러를 우리의 국고로 돌려준 '애국자'일세. IRS의 특수요원이 따로 없지. "

이미 대통령은 N에게 마음을 빼앗긴 듯 싶었다. 벤은 길게 탄식하더니 이윽고 단념한다.

"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

" N, 귀빈대기실로 가 있게나. "

N은 한껏 귀족의 인사법을 흉내내고는 문 밖에 대기하던 경호원들의 호위를 받으며 다른 방으로 이동하였다. N이 나간걸 계속 주시하던 대통령은 그제서야 콧방귀를 한 껏 내뀌더니,

" 건방지고도 정신나간 해커 놈이야. 안 그런가? "

라며 좀 전에 N을 치켜세우던 태도와는 확연히 달라졌다. 당연하지만 벤은 바뀐 대통령의 태도에 어리둥절하면서도 곧바로 눈치를 챈다.

" 자네하고 무슨 인연이 있어선지 모르겠지만, 자네하고 붙어다니면서 작전을 수행할 수만 있다면 정부의 요구를 모두 들어준다고 하더군. 꿀은 충분히 빨아먹고, 벌집이 비면 태워서 짓밟아버리게. 이해했나, 캘링턴 부장? 나는 미합중국 정부가 쓰레기에, 사이코패스 크래커 따위와 거래해서 공익을 얻었다는 사실은 남기고 싶지 않거든. 내가 죽은 후에도, 50년 후에도. 이건 자네에게 내리는 특명이자 자네에게 좋은 기회일세. 일을 제대로 처리할 수 있겠지? "

" 깨끗하게 처리하겠습니다. "

해병대식의 거수경례로 대답하는 벤의 태도에 프리먼 대통령은 흡족해하며 그의 어깨를 다독인다.

" 더 큰 자리에 앉아보고 싶다는 생각, 든 적 없었나? "

" 아뇨. "

활짝 핀 대통령의 얼굴이 다시 시든다.

" 이라크에서 발가락 몇 개 잃고 고자가 될 때부터, 그냥 살아남자는 생각으로만 살아왔는데 무슨 놈의 진급입니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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